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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후기]경이로운 손가락, 소탈한 카리스마
    date : 2015-07-20 20:58:46 / writer : 오푸스 관리자 / Add file : 발렌티나리시차.jpg (ip:1.234.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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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이로운 손가락, 소탈한 카리스마

                         - 발렌티나 리시차 연주회를 다녀와서


손가락은 왜 하필 다섯 개일까? 파충류와 포유류의 발가락이 다섯 개인 이유는, “무게를 지탱하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의 손가락이 정교하게 발달한 것은 두 발로 서서 걷고, 도구를 써서 뭔가를 만들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놀라운 건 아마도 피아노 치는 일 아닐까?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네 개라면 바흐의 삼중 푸가를 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익살스레 말하며, 바흐나 스카를라티가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한 손에 여덟 개씩 손가락을 갖게 됐다면 피아니스트들의 운동피질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거라고 덧붙였다(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돼지>). 바이엘부터 리스트까지, 대부분의 피아노곡은 열 손가락으로 연주하기에 알맞도록 작곡됐다. 피아노란 악기는 인간이 두 손, 두 발로 연주하기에 적합한 크기와 구조로 돼 있다. 피아노로 연주한 음악이 인간의 뇌와 심장을 가장 충실히 만족시킨다는 것도 신기하다. 피아노 음악은 인간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예술이라 할 만하다.


지난 주말, 봄나들이 겸해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발렌티나 리시차의 피아노 독주회에 다녀오는 사치를 누렸다. 오후 5시에 시작한 이날 연주회는 베토벤-슈만-브람스-리스트-쇼팽 등 준비된 레퍼토리를 마치고 마지막 앵콜곡인 파가니니-리스트의 <라캄파넬라>로 이어졌다. 밤 9시를 넘겨서 연주회장을 나올 때까지 인간의 손가락이 이렇게 경이로울 수 있나, 놀라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발렌티나 리시차는 ‘피아노의 검투사’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연주는 도도한 카리스마보다는 쾌활하고 소탈한 품성을 느끼게 한다.


<라 캄파넬라>는 ‘종’(鐘)이란 뜻으로, 현악기의 높은 현을 개방현으로 둔 채 낮은 현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특수 주법이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의 3악장인데,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하여 종소리의 빛나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발렌티나 리시차는 이 곡을 앵콜곡으로 즐겨 연주하며, 청중들은 언제나 큰 소리로 환호한다.


파가니니-리스트 <라 캄파넬라>


이날 연주한 레퍼토리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소감을 적을 수 없다. 베토벤의 <템페스트> 소나타는 폭풍처럼 몰아치기보다는 내면을 응시하는 진지한 해석을 보여 주었다.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다소 빠른 템포로 전체의 구조를 드러내며 찬란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들려주었다.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 12번은 대단한 난곡으로, 손가락이 건반에 어떻게 이토록 착착 달라붙는지, 경외감을 일으켰다. 클라라 슈만이 ‘정체 모를 소음’이라며 연주를 꺼렸던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는 집에서 감상하기는 부담스럽지만, 라이브 연주답게 연주자의 호흡에서 리스트 자신의 내면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연주였다. 쇼팽의 에튀드들은 과거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노래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별>을 연주할 때는 눈물이 날 뻔했다. 40살을 넘기며 더욱 원숙한 세계를 모색하는 예술가의 노고를 느낄 수 있는 연주회였다.


쇼팽 에튀드 E장조 Op.10-3 <이별>                      


발렌티나 리시차는 어린 시절 체스 챔피언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음악에 재능이 뛰어나서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남자친구 알렉세이 쿠즈네초프 - 지금 남편 - 의 권유로 전문음악가의 길을 택하게 됐다. 열린 성품의 그녀는 거리 음악회를 열었고, 유투브에 자신의 연주를 올리곤 했다. 미국 데뷔 때 언론들은 “러시아의 금발 미녀가 한 명 또 왔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그녀의 연주를 목격한 뒤 실력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유투브에 올린 쇼팽의 에튀드는 조회수 6,000만을 기록했고, 그녀는 ‘유투브의 여왕’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리시차는 ‘피아노의 검투사’, ‘건반의 마녀’란 별명이 말해주듯 놀라운 테크닉을 자랑한다. 2013년 한국을 찾았을 때 3시간이 넘는 연주로 젊은 팬들을 열광시켰고 새벽 1시까지 팬들의 사인 요청에 일일이 답한 바 있다. 리시차는 듣는 이와 마음으로 소통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2008년 서울시향과 협연한 뒤 앵콜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한 그녀는 다시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서, 놀랍게도 가장 쉽고 단순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다. 뜻밖의 선택에 청중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나, 곧 음악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현란한 기교에 탐닉하는 게 아니라 자유분방한 젊음을 바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생생한 예술적 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


리시차의 연주는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한 카리스마보다는 쾌활하고 소탈한 품성을 느끼게 한다. 실제 성격도 유쾌하고 꾸밈이 없다고 한다. 한국의 젊은 청중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환호는 우상에 대한 열광이라기보다,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마음의 응원처럼 들린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소탈한 모습을 보면 다른 세계에 있는 스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동호회 친구 한 명이 앞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 내 친구 중에 저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있다니….


리시차는 하루에 10~14 시간 연습하는 노력파이기도 한데, 이번 한국 방문 중에는 식중독을 앓아서 죽과 효소차로 허기를 면하며 연주에 임했다고 한다.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데도 4시간에 걸친 어머어마한 연주에 몸과 마음을 쏟아 부은 그 열정과 책임감이 놀랍다. 그녀는 팬들의 사인 요청에 10시반까지 일일이 환한 미소로 응했다. 리시차는 역동적이고 열정 넘치는 한국의 음악팬들을 사랑한다고 했다.  


리시차는 피아노로 인간 능력의 극한을 표현하며 소통하는 음악가다. 그녀는 레코드사의 상업주의에 휘둘려서 평준화의 길을 걷는 수많은 젊은 피아니스트와 달리 의연히 자기 개성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보기 드문 아티스트다. 그녀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환상곡 C단조를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무척 훌륭했다. 리스트를 잘 치는 사람이 모차르트도 잘 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않은 모차르트를 리시차의 연주로 들을 날도 머지않아 올 것이다.  

글 l 이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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